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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육군장관 <루부아>의 초기, 장관 활동과 평가

by 뽀야찡 2022. 12. 9.

프랑스 루이 14세 때의 육군장관. 1677~91년에는 가장 영향력 있는 장관이었으며 프랑스 군대를 개편하는 데 이바지했다.

[초기]

루부아의 아버지 미셸 르 텔리에는 루이 14세의 총리였던 추기경 쥘 마자랭의 부하이자 육군장관이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하고 힘 있는 관리로 손꼽히던 사람이었다. 추기경이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은 미셸 르 텔리에가 마자랭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리라 생각했으나 그는 왕이 자기 권위에 도전할 만한 야심에 찬 인물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아들을 대신 추천하면서 교묘하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다. 즉 자기 아들의 행정적 수완을 믿어도 될 만하다는 인상을 왕에게 심어주는 한편 몸소 루부아의 교육을 맡았다. 그러나 루부아는 똑똑한 학자가 못 되었고 클레르몽의 예수회 학교에서 수박 겉핥기식의 교육만을 받았다. 더욱이 그는 방탕한 생활을 했고 거의 건달이 다 된 듯했다. 결국 아버지는 그를 육군부에 보내 혹독한 규율에 복종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억압에 반발하기도 했으나 마침내 자신의 능력을 굳게 믿고 군사행정에 폭넓은 경험을 쌓으며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장관으로서의 활동]

루부아는 식견이 늘어남에 따라 지위도 올라갔다. 1662년 그는 아버지가 부재중이거나 일을 할 수 없을 경우에 아버지를 대신해 일할 권리를 얻었다. 같은 해에는 쿠르탕보 후작의 딸 안드 수브레와 결혼함으로써 사회적 지위가 더 높아졌다. 1665년 왕은 루부아에게 부친 르 텔리에의 모든 직무를 수행할 권한을 주었으며 아버지의 동의하에 모든 서류에 서명할 수 있도록 했다. 그가 처음으로 치러야 했던 시험은 스페인령 네덜란드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벌어졌던 상속전쟁 때 닥쳐왔다. 루부아는 왕을 따라 싸움터로 나섰다. 보급품이 모자가 힘들기는 했지만 교육받은 내용을 잘 터득하고 있었으므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르 텔리에는 자신이 대법관직을 받아들인 1677년까지 아들을 계속 지도했다. 이때까지 루이 14세는 서로 긴밀히 협력하는 아버지와 아들로 이루어진 사실상 2명의 육군장관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 뒤에도 루부아는 1685년에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아버지에게 자문을 얻곤 했다. 루부아는 성공적인 공직생활을 했으나 2가지 오점을 남겼다. 그 하나는 앙리 4세 때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몇몇 특권을 주었던 낭트 칙령을 1685년에 철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팔츠를 침략한 것이다. 그는 빈틈없는 정치가로서, 루이 14세가 종교적 통일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고 왕이 원하는 대로 보조를 맞추어 나갔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는 위그노 박해 방법이 군대의 규율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그노 박해보다도 팔츠 침략에 훨씬 큰 책임이 있었다. 루이 14세가 팔츠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자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루부아는 적의 영토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으며, 또한 당시에는 라인란트가 프랑스를 침략하는 기지로 쓰이지 못하도록 할 군사적인 이유에서 그곳을 무너뜨릴 필요가 없었다. 그는 보름스, 슈파이어, 만하임, 하이델베르크 같은 팔츠의 주요 도시들을 파괴하도록 부추겼다. 하지만 왕도 그러한 조처에 찬성했기 때문에 루부아 혼자 모든 비난을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루부아와 왕의 관계는 특히 루부아가 죽기 전 몇 년 동안 종종 긴장되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늘 관리들로 하여금 서로 대적하게 하여 어떠한 신하도 너무 강력해지지 못하도록 애썼다. 그러나 1683년에 콜베르가 죽은 뒤 루부아는 더욱더 세력을 휘둘렀다. 전쟁은 어느 누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였으며 작전 때마다 육군 장관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루부아가 자기주장을 내세울 때마다 루이 14세의 노여움은 커져갔다.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을 치르는 어려운 시기에 루부아가 머지않아 쫓겨나리라는 소문이 궁정에 떠돌았다. 그 시대 사람들은 1691년 7월에 그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바스티유에 갇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견해를 부정하고 있다. 루이 14세는 루부아의 군사적 재능을 매우 아끼고 있었기 때문에 전시에는 그를 제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평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프랑스의 군사제도를 완성한 모든 공로를 루부아의 업적으로 돌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아버지 르 텔리에가 군사개혁을 주도했고 루부아는 아버지의 개혁을 영글게 한 뛰어난 행정가였을 뿐이다. 하지만 루부아는 자기의 임무를 훌륭하게 해냈다. 그가 죽은 뒤에도 프랑스 군대는 여전히 유럽에서 손꼽히는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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