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한때 폴 베를렌과 깊은 관계를 맺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
랭보는 프랑스 북동부의 아르덴 지방에서 육군 대위와 그 지방 농부의 딸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살 위였고, 여동생은 2명이었다. 1860년 랭보 대위는 아내와 헤어졌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키우게 되었다. 일찍부터 남다른 지적 능력을 보인 아르튀르는 8세부터 타고난 글재주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샤를빌 중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그는 특히 라틴어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1870년 8월에는 경시대회에서 라틴어 시로 1등 상을 받았다. 그가 처음 발표한 시는 1870년 1월 <르뷔푸르 투스>에 실렸다. 1870년 7월에 일어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때문에 그의 정식 교육은 막을 내렸다. 8월에 그는 파리로 달아났지만, 차표 없이 여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며칠 동안 감옥에서 지냈다. 그의 옛날 은사가 벌금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두에로 보냈다. 두에에서 그는 국민군에 들어갔다. 10월에 그는 다시 사라져 침략군이 지나간 자국을 따라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다시 두에에 도착하여 2주일 동안 자유와 굶주림과 거친 생활 속에서 쓴 시들을 다듬었다. 삶과 자유 속에서 느끼는 천진난만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들은 그가 처음으로 쓴 완전히 독창적인 작품이다. 어머니의 고발로 그는 다시 경찰에 잡혔지만, 1871년 2월 그는 손목시계를 팔아 다시 파리로 가서 2주일동안 거의 굶다시피 하며 보냈다.
[반항과 시적 환상]
3월 초에 그는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전에 쓴 시들을 가짜라고 내팽개치고, 삶에 대한 혐오감과 순진무구한 세계로 달아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선과 악의 투쟁의식을 표현한 거칠고 불경스러운 시를 썼다. 그의 행동도 그가 쓴 시의 분위기와 어울렸다. 그는 종교와 도덕 및 온갖 종류의 규율에 대한 의식적인 반항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술을 마시며 나날을 보냈다. 동시에 그는 신비주의 철학과 밀교 및 마술과 연금술에 대한 책을 읽었고, 2통의 편지에 표현된 새로운 미학을 형성했다. 특히 2번째 편지는 <견자의 편지>라고 불리는데, 이 제목은 시인이랑 무릇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고 개인의 인격에 대한 인습적 개념을 형성하는 모든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림으로써 영원한 신의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 즉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1871년 9월 파리에 도착한 랭보는 3개월 동안 베를렌 부부와 함께 지내면서 당대의 유명한 시인들을 거의 다 만났지만, 거만하고 버릇없는 태도와 음탕함으로 베를렌만 제외하고 그들 모두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떠나라는 요구를 받자 술을 퍼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베를렌과 동성애 관계를 맺어 추문을 일으켰다. 1872년 3월 그는 베를렌이 아내와 화해할 수 있도록 샤를빌로 돌아갔지만, 5월에 다시 베를렌의 부름을 받았다. 베를렌은 이제 그가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맹세했다.
[여행가와 무역상]
1875~76년 랭보는 독일어, 아랍어, 힌두스타니어, 러시아어를 배우고 세상을 구경하러 떠났다. 1879년 6월까지 그는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고, 서인도 제도의 네덜란드 식민지 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했고, 독일 서커스단과 함께 스칸디나비아로 갔고, 이집트를 방문했으며, 키프로스 섬에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매번 병에 걸리거나 다른 어려움을 만나 고통을 겪었다. 1879년 겨울 내내 장티푸스와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방랑생활을 그만두고 장래 계획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봄에 키프로스 섬으로 돌아간 그는 건축업자의 현장감독으로 취직했지만, 곧 그 일을 그만두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그는 아덴에서 커피 무역상에게 고용되어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의 오가덴 지역에 들어갔다. 이 탐험에 대한 그의 보고서는 프랑스 지리학회 회보에 실려 약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평론]
랭보보다 더 열렬한 연구대상이 되거나 근대시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 시인도 드물다. 그가 독창성을 최대한 발휘한 작품은 산문시 <일뤼미나시옹>인데, 이 시의 형식은 그의 생략법과 난해한 문체를 연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그는 선배 시인들과는 달리 산문시에서 일화를 이야기하고 서술하는 내용이나 심지어는 묘사적인 내용까지도 모조리 제거해버렸고, 낱말에서 사전적 의미나 논리적 내용을 박탈함으로써 상징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에타 담'이라는 정신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거의 마술적인 힘을 시에 부여했다. 그는 또한 잠재의식과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감각 속에 얼마나 풍부한 시의 재료가 숨어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그의 글은 아직도 문명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가장 중요한 본질 자체에 대한 오늘날의 반감과 혐오감을 강렬히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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