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계 캐나다의 정치가. 캐나다인으로서는 최초로 캐나다 자치령의 총리가 되었다. 특히 프랑스계 캐나다가 연방에서 맡을 역할과 영국에 대한 캐나다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하여 노력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97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생애와 교육]
프랑스계 캐나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뉴글래스고 부근의 마을에서 스코틀랜드인 가정교사 아래에서 공부한 뒤 라솜시옹에 있는 기숙학교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가톨릭 사제들에게서 문학교육을 받았다. 그 뒤 몬트리올에 있는 맥길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864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이렇게 두 문화를 모두 교육받았던 것은 그 당시로는 아주 드문 일로서, 이것은 나중에 그가 평생토록 태나다의 통합을 위해 몸 바치는 데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맥길대학교에 있는 동안 성직자에게 적대적이고 공화주의적인 견해를 가진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의 정치모임인 캐나다 협회의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866년 로리에는 건강을 이유로 애서배스카로 옮겼고, 그곳에서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1868년 몬트리올 출신 조에 라퐁텐과 결혼했다. 그가 법조계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의 아내인 에밀리 라베르뉴와 오랫동안 친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녀가 없었던 이들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것 같다. 1871년에 퀘벡 주 의회의 야당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교육개혁을 촉구하는 최초의 유창한 의정 연설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1874년에 캐나다 연방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죽을 때까지 하원의원을 지냈다.
[총리로 향한 길]
로레에는 꾸준히 출세하여 내국세 장관을 거쳐 1887년에는 마침내 야당이었던 자유당의 당수가 되었다. 자유당 당수로 있을 때 그는 현대 캐나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들로 여겨져온 것, 즉 교회와 국가의 관계, 프랑스어권 캐나다인과 영어권 캐나다인 사이의 문화적인 화합, 대영제국과 미국에 대한 캐나다의 관계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캐나다인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 애썼다. 이 몇 년 동안 로리에에게 중요했던 정치적 사건 가운데 하나는 그가 1877년 퀘벡 시에서 행한 자유주의에 대한 유명한 연설이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가톨릭당을 만들려는 퀘벡의 정치가들과, 성직자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려던 자유당 내 극단주의자들 모두를 공격했다. 그의 정치적 수완 덕분에 보수적인 성직자들과 자유주의적인 정치가들 사이의 적대관계는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1896년 이후에는 성직자에 적대적인 사람은 1명도 정부 요직에 앉지 못했고 성직자 역시 공식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게 되었다. 1887~96년 그는 자유당의 조직을 마무리하고 당 전략을 정비했으며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또 지방 당원들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개인적인 매력을 신중하게 이용하여 보수당의 정적들과 자유당의 비주류 당원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 미국과 제한 없는 호혜관계를 맺어 서로 상업적 특권을 부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유당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이 정책이 실현된 뒤 1893년에는 그것을 강령에서 빼버렸다. 1895~96년에 그는 200~300회가량의 회합에서 연설을 했고, 결국 20만 가량의 유권자를 직접 만나본 셈이 되었다. 1896년 중엽에 그는 분열되고 조직이 엉클어진 보수당 정부에 맞서 총선에서 쉽게 자유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로리에의 국민정책]
로리에는 국민적 통합을 대변하는 행정부를 출범시키기 위해 출신 지역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그의 첫 내각에 끌어들였다. 그의 '국민 정책'은 캐나다의 산업을 보호하고 서부를 개척하며, 효율적인 운송체계를 건설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1896~1911년은 로레에 자신이 '20세기는 캐나다의 것'이라는 표어를 내세웠던 경기 부흥의 시대였다. 1897년 예산안에서 관세가 낮아졌지만 보호정책이 확립되어 1911년까지 계속되었다. 토지정책과 이민정책은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15년 동안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니토바와 서부로 이주했고, 서부는 1905년에 서스캐처원과 앨버타 두 주가 되었다. 영국계 캐나다인들은 상호 호혜가 미국에 대한 기회주의적인 항복이며 미국의 캐나다 합병을 향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1911년에 1개월 동안 벌어진 격렬한 유세전에서 당신 70세이던 로리에는 50회가 넘는 연설을 했으나, 제국주의적인 기업가들과 완고한 민족주의자들의 강력한 연합세력을 이겨낼 수 없었다. 그는 캐나다인들이 기대하던 대로 명예롭게 물러났고, 여생을 야당의 지도자로 보냈다.
[평가]
충실하게 그를 따르고 특히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성을 자기 이름으로 삼았던 퀘벡 주에서는 로리에가 카리스마적인 영웅이었고, 그가 총리로 있던 때가 캐나다의 역사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온 생애를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영국계 캐나다인 사이의 협력과 화합을 위해 바쳤고, 다른 한편 캐나다를 가능한 한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상태로 유지하려 애썼다. 그는 개인적인 매력과 위엄, 두드러진 연설솜씨, 타고난 지적 능력으로 캐나다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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