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여러 낭만주의적 요소들이 집약된 10곡의 교향곡과 관현악 반주에 의한 다양한 가곡들로 유명하다. 비록 그가 죽은 뒤 50년 후에야 그의 음악이 인정받았지만 이후 20세기 작곡기법에 있어 중요한 선구자로 인식되었으며 아르놀트 쇤베르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성장과정]
구스타프 말러는 지금의 체크 남서쪽 변방에 위치한 칼리슈테라는 보헤미아 마을에서 유대교 혈통의 오스트리아인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몇 달 후 그의 가족은 일라바 근처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유대인 혈통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인종 차별에 시달렸고, 이것은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체크의 토착인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인에도 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독일에서도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인, 유대인 양쪽 모두에게 이방인이었다. 또한 말러는 부모 사이의 갈등으로 고통받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거세고 활동적인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교양 있는 집안 출신의 섬세한 여인이었으며 아내의 사회적 우위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던 그의 아버지는 폭력으로 그녀를 학대했다. 그 결과 말러는 아버지와는 소원했던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은 신체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다. 다리를 약간 저는 습관은 불구였던 그의 어머니를 모방한 데서 생긴 것이었다. 유년시절 그는 11명이나 되는 형제, 자매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시달리는 것을 보아왔고, 유전적으로 어머니의 약한 심장까지 물려받아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4세무렵 근처 병영에서 들리는 군악과 체크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에 매료되어 이를 아코디언과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소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0세 때 일 라바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으며 15세에는 이미 음악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 빈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피아노와 작곡 분야에서 상을 받고 졸업한 그는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 불규칙적인 개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주요 작품 가운데 처음의 중요한 작품인 칸타타 <탄식의 노래>로 빈 음악원의 베토벤 상에 응모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보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 작곡은 긴 여름휴가에 하려고 잠시 미뤄두고, 지휘자로 변신했다.
[지휘자로서의 경력]
그후 17년 동안 말러는 지휘자로서 최정상에 올라섰다. 오스트리아에서 소극 지휘를 시작으로 부다페스트와 함부르크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두루 거친 다음 1897년 37세의 나이로 빈 궁정 오페라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그는 지휘자로서는 일반 청중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작곡가로서는 처음의 창작 기간 동안 대중들의 몰이해에 부딪쳤으며 이러한 시련은 일생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말러가 주로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완숙기의 작품 모두가 교향악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란츠 리스트 악파의 영향을 받은 말러의 음악적 목표는 개인적인 세계관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본질적으로 자전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오페라라는 극적 수단보다는 가곡과 교향곡이 적합했다. 즉 가곡은 개인적인 서정성을 갖추고 있고 교향곡은 주관적인 표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작품]
말러의 창작시기는 3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매 시기마다 그는 각각 3부작 교향곡을 작곡했다. 초창기의 교향곡은 음악 외적인 이야기나 생각에 근거한 표제적인 기초에 입각하여 작곡했다. 이 교향곡들의 제목은 나중에 삭제했지만 고통과 죽음, 의혹과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 근거의 확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Pas-toral>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의 예를 따라 그때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지던 4악장 구조를 탈피하여 한 곡의 교향곡 안에 더 많은 악장을 포함시켰다. 시간의 확장과 다양한 음색을 내기 위한 여러 관현악법의 사용과 무제한적 감정 표현의 추구에 있어서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독창과 합창의 도입은 베토벤의 교향곡 9번 d단조 <합창 Choral>을 따랐고, 다른 작품에 자신의 가곡을 도입한 것은 슈베르트의 실내악을 따른 것이었다.
[중기 작품]
말러는 빈 오페라 극장, 그리고 한동안 빈 필하모닉 연주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아무도 다룰 수 없는 작품 해석과 새로운 연주 기준을 확립했다. 광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개인적인 사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과 단원들을 몰아붙였기 때문에 그의 해직을 획책하는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많은 순회 연주를 가짐으로써 유럽 각지에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중기에 작곡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숙기에 들어서 말러의 맹렬한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초기의 특성을 지닌 교향곡 4번만이 유일하게 예외에 속한다. 6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 포함된 피날레 악장은 원래 교향곡 3번의 한 악장으로 구상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대한 순박한 촌부의 생각을 나타낸 소프라노를 위한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 곡은 분명한 표제와 합창 없이 일반적인 교향곡에 가까운 면모를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 있어서 중기의 3대 교향곡인 5번, 6번, 7번 교향곡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말기 작품]
1907년을 기점으로 그의 말기가 시작되었고 47세의 말러는 다시 여기저기를 옮겨다녀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공연을 감독하고 뉴욕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가 되는 등 미국에서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새롭게 쌓아야 했다. 매년 여름 오스트리아의 시골로 돌아가 작곡했으나 1911년 결국 빈으로 돌아와 죽었다. 말기의 3대 작품은 <대지의 노래>, 교향곡 9번, 완성되지 못하고 전체에 걸친 포괄적인 스케치만 되어 있는 교향곡 10번 F#장조인데 말러는 이것들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가운데 말러의 미신에 대한 성향이 다시 나타난 <대지의 노래>는 독일어로 번역된 중국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으로 시작하며 '테너, 바리톤,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경우처럼 9번째 교향곡은 그 작곡가의 마지막 교향곡이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을 '교향곡 9번'이라고 부르려 하지 않았다. 그 후 교향곡 9번의 작곡을 시작했을 때 그는 반 농담조로 이 작품이 '실제로는 10번째' 교향곡이므로 위험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향곡은 결국,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되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교향곡 10번은 스케치로만 남았다.
[평가]
현대 비평가들은 20세기에 들어와 일어난 음악의 대변화에 끼친 말러의 지대한 영향을 인정하고있다. 그의 작품에는 20세기의 급진적 기법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한 요인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는 '경과적 조성'과 조성의 해체, 전체 관현악의 영역 안에서 독주 악기 그룹에 의한 대위법적 짜임새로의 이탈, 단순한 주제의 재현보다는 지속적으로 주제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원리, 대중 양식과 일상생활에서의 자연 음향에 대한 풍자적 인용, 리스트의 '순환' 기법에서 응용한 교향곡의 새로운 형식적 통합 방법 등을 들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