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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의 물리학자. 수학자 <뉴턴>의 생애

by 뽀야찡 2022. 12. 30.

영국 출신의 물리학자. 수학자. 17세기 과학혁명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광학, 역학, 수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1687년에 출판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는 근대과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책으로 꼽힌다.

뉴턴은 1642년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할머니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그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고, 이것은 그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보인 심리적 불안감이나 비판에 대한 지나친 반응 등은 모두 어렸을 때의 모성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랜트햄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1661년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당시는 과학혁명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대학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 체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으나, 곧 데카르트를 접하게 되었고 우주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운동과 물질로 설명하려는 기계적 철학에 매료되었다. 1664년경부터 쓰기 시작한 <몇 가지 철학적 문제들>이라는 기록은 과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신호였다. 그는 제목 아래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첨가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나의 친구다. 하지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진리다." 그가 다른 '문제들'을 보면 그가 과학혁명의 근간이 되는 새로운 생각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데카르트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도 공부했는데 그는 여기에 더욱 끌렸다. 로버티 보일의 책에서는 화학에 관한 지식을, 케임브리지의 플라톤주의자였던 헨리 무어를 통해서는 허미티시즘 전통을 접했다. 자연철학의 중요한 두 전통인 기계적 철학과 허미티시즘 전통은 지속적으로 그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부터 수학에 관한 연구도 시작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에서 대수적인 기법을 기하학에 적용하는 법을 배웠고 고전기하학도 깊게 공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1669년까지는 그동안의 성과를 종합하여 <무한급수에 의한 해석학에 관하여>를 펴낼정도로 발전했다. 그 후 2년 동안 보완해서 <급수와 유율의 방법에 관하여>를 수고 형태로 세상에 내놓았다. 1665년 4월 학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과 수학의 세계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그해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자 고향집에 돌아와 2년 동안 그가 배운 것들에 대해 여유를 갖고 명상했다.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의 기초가 다져지고, <색깔에 관하여>에 정리될 중요한 내용들이 나타난다. 또 원운동의 요소들을 분석했고 이것을 달과 다른 행성들에 적용해서 역제곱법칙을 유도했다. 그러나 이 발견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2년 후에는 아이작 배로우의 후임으로 루카스 석좌 수학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광학에 대한 강의로 교수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색깔에 관하여>로 발전되고 후에 <광학>의 제1권이 되었다.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으로 빛이 기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는 달리 빛을 원자와 같은 작은 입자들이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가 광학에 끼친 가장 큰 공헌은 무엇보다도 색깔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빛은 원래 흰색의 단색광이고 변형에 의해서 여러 가지 색깔로 나타난다는 고대로부터의 색깔이론을 부정했다.

그의 색에 관한 이론은 런던의 왕립학회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1671년 반사망원경의 발명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졌고 왕립학회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학회에 제출했다. 이 논문은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학회 지도자였던 로버트 훅과의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훅의 신랄한 비판은 그를 격노하게 만들어 결국 한동안 모든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고립생활에 들어가게 했다. 1675년 런던을 방문한 뉴턴은 훅이 자신의 색깔이론을 인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자신을 얻어 얇은 막에서의 색깔현상을 다룬 2번째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은 빛이 반사를 통해서도 분해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 고체의 색현상을 설명했고, 뉴턴의 원무늬 발견도 싣고 있다. 이것은 후에 <광학> 제2권의 내용이 된다. 훅과의 관계는 이 논문의 발표로 더욱 악화되는데, 훅은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또 영국의 한 예수교 분파도 이 논문의 내용을 공격했다. 1678년까지 계속된 이 싸움은 뉴턴의 신경쇠약을 동반한 발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그 후 6년 동안 그는 외부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 격리기간 동안 허미티시즘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전부터 흥미를 갖고 있던 연금술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자연관도 큰 변화를 겪어서 기계적 철학에서 벗어났다. 1679년 빛의 현상을 설명하려고 도입했던 에테르와 그에 수반된 눈에 보이지 않는 체계를 포기하고, 대신 인력과 척력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인력과 척력을 지상의 현상에만 적용했다. 그러나 1679년 말부터 훅의 편지에서 암시를 받아 행성의 운동에도 이 개념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뉴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훅은 인력에 의해서 직선운동이 지속적으로 방향을 바꾸어나간다는 점과 중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감소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직관에 의한 추측일 뿐 구심력이나 케플러의 제3법칙에서 수학적으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뉴턴은 이미 10년 전에 이러한 관계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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