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화가. 시인. 비전통적 방식으로 종교와 도덕 및 중세의 주제를 다루는 화가들의 단체인 라파엘 전파 협회 상철에 이바지했다. 그는 로제티 가문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과 초기 작품]
로제티는 1836~41년 킹스 칼리지 중등부에 다녔는데, 이 학교에서 수채화가인 존 셀 코트먼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일반 교육을 마친 뒤 시인이 될지 아니면 화가의 길로 들어설지 망설였다. 14세 무렵에 그는 런던의 중심부인 블룸즈버리에 있는 구식 미술학교 '새스드로잉 학교'에 다녔고, 1845년에는 왕립 아카데미 부속학교에 들어가 정식 학생이 되었다. 한편 그는 낭만주의 문학과 시, 셰익스피어, 괴테, 바이런, 스콧, 고딕풍의 공포 소솔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고, 미국 작가인 에드가 앨런포의 작품에 매혹되었다. 포의 시 <까마귀>를 읽고 그린 극적 삽화는 로제티가 책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수많은 초기 소묘들 가운데 하나였다. 1847년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자신의 시와 산문에 직접 삽화를 그려 넣은 작품집을 구입함으로써 이 18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이며 몽상가를 발견하게 된다. 그 후로 이 책은 로제티 필사본으로 불리게 되었다. 화가이자 미술 평가인 조슈아 레이놀즈 경에 대한 블레이크의 통렬한 비난은 로제티를 즐겁게 해 주었고, 그로 하여금 시시한 일화를 주제로 다루는 초기 빅토리아 시대 그림의 진부함과 시시함을 풍자하도록 부추겼다. 그는 특히 에드원 랜시어 경의 그림을 조롱했다. 20세가 될 때까지 그는 이탈리아 시를 많이 번역했고 독창적인 시도 몇 편 지었지만 화가들의 화실도 자주 드나들었으며 한동안 포드 매독스 브라운이라는 화가의 청강생이 되기도 했다. 브라운은 독일의 엄격한 나사렛파를 극찬했는데, 로제티도 브라운의 이러한 견해를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순수한 표현 양식과 목적을 독일 미술에 되살리려 한 나사렛파는 '독일의 라파엘 전파'라고도 불렸다.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미술 개혁 운동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필사본 시집에 <예술로서의 가톨릭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였다. 초기 유화 작품인 <성모 마리아의 처녀시절>, <수태고지>는 단순한 화풍으로 그려졌지만 정교한 상징적 표현을 보여준다. '예술로서의 가톨릭'은 별다른 종교적 의미는 갖고 있지 않지만, 1850년에 라파엘 전파의 잡지인 <싹> 창간호에 발표된 그의 시 <축복받은 처녀>의 생생한 묘사와 풍부한 감정에 뚜렷이 드러나 있다.
<수태고지>는 1850년에 전시되었을 때 혹평을 받았고, 로제티는 그 혹평을 의연하게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그는 더 이상 대중 앞에 그림을 공개하지 않았고, 유화 대신 수채화를 선택했다. 수채화는 아는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나누어 줄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전통적인 종교적 주제를 버리고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라우닝 및 단테의 작품에 나오는 장면을 주제로 삼게 되었는데, 이런 주제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 수 있는 여지를 보다 많이 제공해주었다. 1856년부터 그는 토머스 맬로리 경의 <아서 왕의 죽음>과 테니슨의 <왕에 대한 찬가>에서 영감을 받아 선명한 색깔의 무늬가 든 문장과 중세에 기사의 갑옷과 여자들의 옷을 장식했던 부속품으로써 전설적인 아서 왕 시대를 환기시키게 되었다. 1856년 그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대학 잡지에 글을 기고했는데, 이를 계기로 하여 그 당시 옥스퍼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에드워드 번 존스와 윌리엄 모리스를 알게 되었다. 이 젊은 두 제자와 함께 그는 라파엘 전파 운동의 2번째 단계를 시작했다. 첫 번째 단계의 특징이 '자연에 충실한' 사실주의였다면, 이 새로운 출발의 주요한 2가지 측면은 전설적 과거에 대한 낭만적 열정과 응용 미술인 디자인을 개혁하겠다는 야심이었다. 다른 화가들도 로제티의 영향을 받아 아서 왕의 전설을 그림 주제로 삼았고, 그 영향은 다른 예술 분야에도 파급되었다. 1856년에 의뢰받은 랜대프 대성당의 3폭 제단화 <다윗의 자손>은 1857년 옥스퍼드 학생회관의 토론실을 아서 왕의 전설을 다룬 벽화로 장식하겠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의 전주곡이었다. 로제티와 그의 조수인 번 존스와 모리스 등은 기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서 이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했지만 예술의 범위가 공예에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말년]
1860년부터 로제티는 시련 속에서 불안정한 생활을 영위해나갔다. 엘리자베스 시설은 항상 건강이 나빴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먹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엘리자베스가 1862년에 아편 과용으로 죽는 바람에 이 결혼은 결국 비극적으로 끝났다. 슬픔에 빠진 로제티는 그가 지은 시들을 모아 단행본으로 엮은 유일한 필사본을 아내와 함께 묻었다. 그가 아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신비주의적이고 이상적인 사랑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1863년에 그가 그린 <베아타 베아트릭스>라는 상징적인 그림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로제티의 생활과 예술은 이제 크게 변화되었다. 그는 런던의 도미니쿠스 수도원 구내에 있는 강변 저택을 떠나 첼시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의 영향으로 예술에 대해 좀 더 미학적이고 감각적으로 접근하게 되었다. 문학적 주제보다는 평범한 미녀들을 그렸다. 오랫동안 그의 모델이자 애인이었던 파니 콘포스에게 화려한 옷을 입혀 유화를 그렸는데, 그가 유화물감을 그처럼 자유자재로 구사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런 그림들은 인기를 얻었고, 로제티는 화실에 조수들을 고용하여 복제품과 모사화를 제작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해졌다. 그는 골동품을 수집하였고, 잘 가꾸지는 못했지만 넓은 첼시 저택의 정원을 동물과 새들로 채웠다. 로제티와 그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는 스코틀랜드의 펜킬 성을 자주 방문했는데, 이 성은 그들의 친구인 앨리스 보이드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로제티는 새로운 시를 짓고, 하이게이트 묘지에 아내와 함께 묻혀있는 필사본을 되찾을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사업가 찰스 오거스터스 하월의 주선으로 1869년에 실행되었지만, 이 발굴 작업은 미신을 믿는 로제티를 무척 괴롭혔다. 이 <시집>은 1870년에 출판되어 좋은 평판을 받았지만, <육감 적시>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던 토머스 메이틀랜드가 로제티를 공격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런 공격은 후회 및 약물 작용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결국 1872년에 로제티의 심신 쇠약을 초래했다. 얼마 후 그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지만,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을 병자나 다름없는 상태로 은둔 생활을 했다. 1874년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1871년에 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임대한 옥스퍼드 근처 켈름스콧 장원에서 보냈다.
그 후 로제티는 첼시로 거처를 옮겼지만, 은둔생활을 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찾아오고, 오랜 친구인 포드 매독스 브라운과 수많은 후기 제자들, 그리고 로제티의 재정문제를 순조롭게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변호자이자 문필가인 시어도어 와츠 던톤이 그의 말벗이 되어 줄 뿐이었다. 그는 초기에 그린 수채화 <단테의 꿈>을 모사하고, <시집>의 개정판을 내고, 남녀의 사랑을 비극적으로 강렬하게 묘사한 <생명의 집>이라는 소네트를 완결하여 다른 시들과 함께 <발라드와 소네트>라는 책으로 엮는 일에 열중했다. 1881년에 영국 북서부의 케스윅을 방문했다가, 건강이 악화된 채 돌아온 그는 이듬해 봄에 영국 남동부에서 가족과 몇몇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런던 밖에서는 한 번도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했고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도 없었지만, 존 러스킨은 그를 "런던이라는 지옥에서 길을 잃은 위대한 이탈리아인"으로 묘사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시에 대해 높은 식견을 지녔으며 발라드 양식에서 <니네베의 짐>에 나오는 철학적 사상에 이르기까지 시적 표현 수단으로서 영어가 갖고 있는 다양한 형태와 리듬에도 통달해 있었다. 그가 가족이나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평이하고도 상냥한 문체는 말투가 전혀 다르다. 이 편지 덕분에 그는 훌륭한 서간문 작가의 대열에 올라 있다. 화가로서의 로제티를 오늘날 관점에서 바라보면 영국만이 아니라 유럽 대륙에도 영향을 미친 상징주의의 한 형태를 창시한 인물로 존경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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