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가. 진보주의 운동의 기수로서 위스콘신 주지사와 연방상원의원을 지내는 동안 개혁입법가로 이름을 떨쳤다. 1924년 진보정치연합의 단일후보로서 대통령 선거에 임했으나 총투표의 1/6에 해당하는 약 500만 표를 획득하고도 낙선하는 불운을 겪었다.
[과정]
비교적 유복한 농촌가정에서 성장하여 1875~79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880~84년 군 검사를 거쳐 하원에 진출했다. 그는 독특한 인성과 기품에 힘입어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이는 천부적인 웅변술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보기 드문 사교성으로 인해 유권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포용했기 때문이었다. 연방하원의원으로서 로버트 마리온 라폴레트의 주요 관심사는 정부지출의 삭감과 농민계층의 권익옹호에 있었으며, 선거구민의 이해가 당 지도부의 노선과 상치될 때에도 주민들의 대변자임을 잊지 않았다. 1881년 12월 31일 군 검사로서 1년을 재임한 뒤 대학에서 만난 벨 케이스와 결혼했다. 1890년의 민주당 선풍으로 재선에 실패한 한 라폴레트는 매디슨으로 돌아가 변호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정치 조직을 발전시켰다. 이에 힘입어 그는 10년 이내에 공직에 복귀했고 사망 시까지 위스콘신 주 정치를 지배하게 된다. 정계의 거물들에 대항한 그의 명성은 1891년 위스콘신 주 공화당 지도자 필리터스 소여가 자신에게 뇌물을 증회 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후 6년간에 걸쳐 공화당 내 스톨워트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스칸디나비아계 이민, 낙농업자, 청년 지식인들을 결집시켜 좌파세력을 구축했다. 자연스러운 매력과 뛰어난 조직력, 능란한 웅변술과 주지사에 대한 열망 등은 이내 그를 새로운 공화당 세력의 지도적 인물로 부각시켰다.
[위스콘신 주지사 시절]
1897년 라폴레트는 몇 달 전 주의회 회기 중에 지방의 진보주의 대의원들이 발의한 일단의 입법계획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의견에 공감한 라폴레트는 세제개혁과 기업활동의 규제 그리고 보다 심도있는 민주화 조치를 요구했으며, 특히 철도세의 대폭적인 인상과 예비선거의 직선 제화를 주장했다. 그는 1900년 이들 공약에 힘입어 주지사로 선출되었고 1902년과 1904년 연이어 재선되었다. 주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새로운 정치기술들을 고안해냈는데, 이는 나중에 연방상원에서까지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 정치기술의 하나는 이른바 '위스콘신 발상'이라는 이름으로 주목을 끌었던 것으로 법령의 입안과 새로이 조직된 주 단위 규제기구의 관리를 위하여 위스콘신대학교로부터 한 번에 57명에 달하는 교수요원을 채용한 것이고, 2번째 혁신은 자신의 개혁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지역 의회에 대하여 공개적인 출결 독회를 시행한 것이었다. 라폴레트 위스콘신 주지사는 이러한 제도혁신을 통하여 다수의 진보 입법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철도문제를 주 정치의 주요 현안으로 간주했던 그는 의회를 설득하여 철도회사의 소유자산에 따라 차등세율을 책정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고, 1905년에는 이들의 규제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03년 예비선거에서도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1905년 특별규제위원회와 함께 주 공무원 제도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신설된 지방세 과세위원회는 자산평가에 형평을 기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위스콘신 주지사 라폴레트는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주의 운동의 기수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연방 상원의원 시절]
1906년 주지사직을 사임한 뒤 로버트 마리온 라폴레트는 연방상원에 진출했다. 상원은 '백만장자들의 도피처'라는 오명을 듣기에 충분했다. 그는 사리사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참신한 정치인으로서 주목을 끌었고 첫 3년 동안 화물운임 인상 및 노동정책, 철도운송에 대한 재정지원에 반대하는 일련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들 입법과정에 반영된 정치이념은 차후 그의 의정활동을 결정짓게 되는데, 그의 생각에 따르면, 정치란 소비자, 납세자로서의 일반시민과 자기본위의 이윤을 추구하는 대기업 사이의 끊이지 않는 권력투쟁 과정이며 대기업주들은 법률이 마련하는 여러 특권들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고 있었다. 노동입법의 후원자였던 라폴레트는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조합의 적 역시 대기업이며 노동조건의 향상이 곧 소비자의 이익으로 직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08년의 '올드리치-브릴런드 통화법'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철저한 증거자료수집에 근거하여, 미국의 국민경제는 100명 미만의 유력인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다시 이들 유력인사들을 좌우하는 것은 J. P. 모건과 스탠더드 석유투자은행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의 관심사는 철도재벌의 비리로부터 그들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대은행주들에게 전환을 이루게 된다.
[반전운동]
1917년의 국제 정세는 라폴레트의 정치적 지도력을 되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이래로 미국의 대외 간섭은 미국 기업의 투자를 보호하고 그 지역 내의 혁명을 분쇄하려는 저의를 담고 있다고 논박해왔다.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거론되기 시작하자, 그는 여론의 향방에 대해 무지한 우드로 윌슨을 공박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대전 개입을 반대하고 있다고 확신한 그는 1916~17년에 이에 대한 국민투표 회부 캠페인을 주도했다. 1917년 상선의 무장화가 의안으로 상정되자 상원 내 의사진행 방해 세력을 이끌었으며 전쟁 선포 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일단 동맹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발령되고 난 후 라폴레트는 징병에 반대하고 반전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의 권익을 옹호했으며, 부자들과 대기업을 위한 전쟁이므로 이들이 전쟁비용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전쟁 지지자들은 반역죄의 혐의를 들어 그를 축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상원조사위원회는 그의 무죄를 선언했다. 광란과 같은 전쟁의 순교자로서 그는 다시 한번 수백만 미국민들의 영웅이 되었다. 전쟁에 대한 환멸이 짙어가고 민주당, 공화당 모두의 보수성에 대한 노동자, 농민들의 절망감이 심화됨에 따라 라폴레트를 제3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목하는 일단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농민 - 노동자 대표자 회의의 후보 지명을 거부하고 1924년 진보당의 지명을 받아들인 라폴레트는 농민단체, 노동조합, 원로 진보주의자, 사회당, 스크립스 - 하워드 신문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는 11개 주에서 2위의 득표를 올리고 총투표의 1/6에 해당하는 득표율을 보였으나 단지 위스콘신 주에서만 승리를 거두는 불운을 겪었다. 1925년 6월 18일 집무중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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