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업가. 발명가. 1831년부터 기계수확기의 발전에 공헌했다. 그는 농부, 대장장이, 발명가인 로버트 매코믹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학력은 지방학교에서 교육받은 것이 전부이다. 신중하고 단호하며 사려 깊었던 그는 전 생애를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보냈다. 아버지 로버트 매코믹은 몇 가지 실용적인 농업용 기구들을 발명했지만 미국과 영국의 다른 발명가들처럼 성능이 뛰어난 수확기를 발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1831년 22세 때 사이러스 매코믹은 수확기 발명에 착수했다. 이때 발명한 2륜 마차같이 생긴 수확기는 2개의 진동 절단날, 곡물을 옮기는 릴, 떨어지는 곡물을 받는 밑받침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 기계는 후에 만들어진 곡물 수확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19세기 초 농부들은 수확에 많은 일손이 필요했으며, 일손을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이 너무 비쌌다. 1831년 매코믹이 발명한 수확기를 이웃 농부의 농장에서 시험한 결과 일손에 제한받지 않고 얼마든지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기계는 달각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말이 놀랄 정도였기 때문에 일꾼이 말을 진정시켜야 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결점이 있었다. 1834년 매코믹은 특허권을 획득했지만 그의 최대 관심은 가족이 경영하는 주철공장에 있었다. 1837년 은행 공황이 일어났을 때 이 주철공장은 파산했고 가족들은 빚에 쪼들리게 되었다. 그는 당시 이용되지 않던 수확기에 관심을 돌려 그것을 개량했다. 그리고 1841년에 2대, 1842년에 7대, 1843년에 29대, 이듬해에는 50대의 수확기를 팔았다.
1844년 미국 중서부 초원 지대의 여러 주를 돌아본 후 돌이 많고 험한 동부지역보다는 이 광대하고 기름진 곡창지대에 그의 수확기와 세계 밀생산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몇 가지 특허품을 더 발명한 그는 1847년 당시 호숫가에 위치한 습지대에 불과했던 시카고의 작은 마을에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은 시장이던 윌리엄 오그덴이 자기 돈 5만 달러를 투자하여 매코믹과 동업으로 시작되었다. 사업을 시작한 첫 해에 800대의 수확기를 팔았다. 이듬해에는 더 많은 기계를 팔아 매코믹은 오그덴의 주식을 모두 사들였다. 매코믹의 주요경쟁자인 오베드 허시의 기계는 수확기로서는 매코믹의 기계보다 못했지만 농작물을 베는 기능은 더 우수했다. 1848년 매코믹의 기본적 특허기간이 만료되자 허시를 비롯한 그의 경쟁자들이 특허기간 갱신을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때 일어난 법정 투쟁은 매코믹이 겪게 될 수많은 소송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는 경쟁 사업가들뿐만 아니라 아내의 화물에 8달러 75센트의 요금을 더 부과한 뉴욕 센트럴 철도회사를 상대로 한 2만 달러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법정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는 이 소송을 3번씩이나 대법원에 상소했으며 비록 20년이 걸리기는 했으나 결국 승소했다. 그러나 1848년의 특허권 갱신 소송에서는 이기지 못했다. 1831년 특허를 받은 개량 수확기들을 제외하고 기본적인 기계들은 일반화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기계를 더 좋은 가격에 판매하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매코믹은 주문서로 가득 찬 가방 하나를 들고 수확기를 팔기 위해 농부들과 농부 후보생들을 찾아서 대평원을 돌아다녔다. 더 많은 기계를 팔기 위해 그는 대량생산, 광고, 실물설명, 품질보증서, 고객신용의 확대 등 여러 가지 혁신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곧이어 공장이 확장되고 순회 판매를 하게 되었다. 1850년 미국 전역에 매코믹 수확기가 알려졌으며 1851년 런던에서 열린 대박람회에 출품한 것을 계기로 유럽 농민들에게도 소개되었다. 런던의 <타임스 The Times>지가 매코믹의 기계를 놓고 "바퀴가 하나 달린 수레, 마차, 날아다니는 기계의 혼합물"이라고 조롱했지만 결국 그의 수확기가 대상을 받았다. 1855년 파리 국제박람회에서도 최고 명예상을 받았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상을 받았기 때문에 매코믹 수확기는 전 세계 농부들에게 알려졌다. 1856년에는 연간 4,000대 이상의 수확기를 팔았다. 1858년 49세에 낸시(네티) 폴러와 결혼했을 때 <시카고 데일리 프레스 Chicago Daily Press>는 매코믹을 "산업분야의 위대한 토르(Thor) 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가 사업에만 모든 힘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과 장로회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면서 시카고에 매코믹 신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1871년 시카고 화재로 그의 공장은 완전히 불탔다. 그러나 당시 60세가 넘었던 매코믹은 다시 사업을 일으켰으며 그 뒤에도 계속해서 사업에 성공했다. 그가 죽을 무렵에도 사업은 계속 번창하고 있었다. 1902년 매코믹하비스팅사는 다른 회사들과 연합해 인터내셔널 하비스터사를 만들었고, 초대 사장은 매코믹의 아들인 사이러스 2세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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