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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건축가 <리처드슨>의 생애 일대기와 성격

by 뽀야찡 2022. 12. 15.

미국의 건축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로마네스크 복고양식을 사용했고, 미국식의 고유한 근대건축 발전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보스턴에 있는 브래틀 스퀘어와 트리니티 교회군, 하버드대학교의 세버 홀과 오스틴 홀, 시카고의 글레스너 저택 등이 있다.

[리처드슨의 생애]

리처드슨은 18세기 영국 정치와 종교를 반대한 비국교도로서 산소를 발견했던 조지프 프리스틀리의 증손자였다. 훌륭한 가문 전통과 붙임성 있는 성격 덕분에 1855년 별 어려움 없이 남부를 떠나 하버드로 이주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은 결국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이무렵 하버드대학교는 지적인 자극을 주기보다는 개인적인 교류의 길을 터 주었는데 헨리 애덤스를 비롯해 나중에 그의 고객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쉽게 가입할 수 있었던 '포셀리언 클럽'과 그 밖의 여러 사회단체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그는 영영 남부로 돌아가지 않았다. 리처드슨은 하버드 시절에 건축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보스턴에는 훗날 그의 걸작품에 영향을 끼친 밋밋한 화강암으로 지은 건축물이 많이 있었으나 남북전쟁 전 미국에는 건축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정식 교육은 해외에 나가서 받아야만 했다. 루이지애나 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프랑스어에 능숙했던 그는 1860년부터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으나, 1862년 남북전쟁으로 집에서 부쳐오는 돈이 끊기자 공부를 중단했다. 그 뒤 프랑스 건축가 테오도르 라브루스트의 건축설계사무소에 들어가 1865년 10월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라브루스트와 함께 일했다. 파리에서 그는 분석적인 건축계획 방법을 터득했는데 이는 그의 완숙기 작품에 잘 나타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친구이자 건축가인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 줄리앙 가데가 1902년 파리에서 출간한 <건축의 요소와 이론>에 잘 나타나 있다.

러처드슨은 곧 성공할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미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의 건축가들 가운데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꼽혔고 중요한 친분관계를 많이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66년 11월 처음으로 의뢰받은 작품인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유니티 교회를 설계했다. 이 교회는 그의 동창생 1명이 교구 회원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리처드슨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무렵인 1867년 1월 3일 보스턴에서 줄리아 고럼 헤이든과 결혼했다. 이들은 리처드슨이 직접 설계한 뉴욕주 스태턴아일랜드의 집으로 이사했는데, 6명의 자녀 중 5명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웃에는 프레더릭로 옴스테드가 살고 있었다.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유명한 조경가로서 나중에 리처드슨과 종종 공동으로 작업했다. 그 뒤 리처드슨은 8년 동안 뉴욕시에서 살며 활동했다. 1864년 10월에는 건축가인 찰스 갬브릴과 동업해 꼬박 11년간 같이 일했으나 그 이유는 단지 경영상의 편리함 때문이었다. 그는 맨해튼의 사무실과 스태턴아일랜드 집의 제도실에서, 초기에 스프링필드에서 위탁받은 설계와 버펄로의 주립 정신병원, 보스턴의 브레틀 스퀘어와 트리니티 교회군을 설계했다. 유명한 전도사인 필립스 브룩스를 위해 설계한 트리니티 교회군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미국 성공회 교회이다.  그는 이 교회들에 로마네스크 복고 양식을 씀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모방했다. 뉴잉글랜드로부터 너무나 많은 설계 의뢰가 들어와 보스턴으로 이사하는 것이 더 나을 정도였다.

1874년에는 남부 대농장주택 형식으로 19세기 초에 지은 브루클린 교회의 저택을 사들여 사무실과 작업실을 덧붙였다. 그는 생의 마지막 12년을 어린 시절의 주변 환경을 회상시켜 주는 활기찬 곳에서 가족과 조수들과 함께 보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명성을 높여준 건물들을 만들어냈다. 주택, 지역공동체 도서관, 교외철도 역사, 교육기관, 상업용 건물, 공공건물 등을 설계했다. 그 시대 건축가들은 조각난 듯한 매스와 좁은 수직적 비례, 서로 다른 고딕 양식의 여러 특성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리처드슨은 로마네스크나 비잔틴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수평선, 단순한 윤곽, 그리고 균일하고 큼직한 상세 기법을 즐겨 썼다. 이 가운데 가장 훌륭한 상업용 건물인 시카고의 마셜 필드 백화점과 미국 동북부 지역의 대부분의 철도역사들은 오래전에 헐렸다. 그러므로 그의 말기 작품은 하버드대학교의 세버 홀과 오스틴 홀, 피츠버그의 앨러게니 군 청사, 시카고의 글레스너 저택, 워번과 노스이스턴에서 퀸시와 몰던에 이르는 여러 도시의 도서관을 중심으로 알 수 있다. 퀸시에 있는 크레인 기념 도서관은 기와를 얹은 박공지붕과 나란히 늘어선 천창, 거칠게 다듬은 3층의 화강암 기단, 그리고 움푹 들어간 출입구 아치 등 3부분이 특징을 이루며 그의 원숙기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건물이다.

[성격]

리처드슨은 사교적이며 발랄한 사람이었다. 뚱뚱한 몸집을 가진 그는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왕성한 식욕으로 유명했다. 미국 조각가인 오거스터스 세인트 고든스 같은 친구들과 함께 많은 양의 샴페인과 식도락의 요리를 즐겼다. 특별한 경우에는 볼티모어에서 배로 실어온 체서피크 만 산 굴요리를 대접하거나 한 필라델피아 레스토랑에 식용 거북 요리를 시킨 뒤 주방장이 직접 배달 오게 하곤 했다. 이러한 생활습관이 그를 일찍 죽게 했지만 브라이트 병이라고도 하는 만성 신장염으로 내내 시달린 데다가 1880년대에 휴가를 단 1번 보냈을 정도로 바쁘게 일한 것도 일찍 죽은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 휴가란 다름 아닌 유럽의 로마네스크 건축을 살펴보기 위해 회오리바람처럼 급하게 다녀온 1882년 여름의 여행을 말한다. 그는 이 여행을 다녀온 뒤 4년 만에 비만증에 피로가 겹쳐 죽었다. 그의 명성이 절정에 오르고 보스턴, 피츠버그, 오하이오 주의 신시내티, 시카고,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 등지에 그가 설계한 주요 건물이 한창 세워지고 있을 때 죽은 것이다. 그의 뒤를 이은 보스턴 건축가 셰플리, 루탄, 쿨리지의 건축설계사무소가 작업을 맡아 완성했고 시카고 건축가 설리번과 라이트는 그가 처음 닦기 시작한 전통을 계속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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