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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정치가 <밀류코프>의 초년과 정치, 외무장관 시절과 말년

by 뽀야찡 2022. 11. 10.

러시아의 정치가. 역사가. 2월 혁명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리보프 공의 임시정부에서 외무장관을 지냈다.

[초년기]

1877년 모스크바대학교에 입학했고 러시아사 전문가로 곧 두각을 나타냈다. 3부작 <러시아 문화사 Ocherk : po istorii russkoy kultury>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초기 자유주의의 대변인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1895년 지나친 정치성향으로 교사직을 박탈당한 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선진 민주국가들의 정치적 가치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03년과 1904~05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러시아의 역사와 정치를 주제로 대중강연을 했다. 밀류코프는 서구화에 대해 신념을 갖게 되었고 차르 체제가 러시아 발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러시아의 자유주의를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켜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급진적으로 변혁시키고자 노력했으며 특히 법치주의, 의회정치, 보통선거, 기본권 신장, 대중교육, 토지개혁 등을 지지했다.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관념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으며 지나치게 원리원칙에 집착한 나머지 현실정치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초기 정치활동]

1902년 창간되어 암암리에 유포되어온 <오스보보주데니예> ('해방'이라는 뜻) 지의 기고가로서 젬스트보의 중도파 인사들을 좌경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직업 노조 연합체인 '노조의 노조' 그리고 입헌 민주당의 창설을 주도했으며 당 일간지 <레치 Rech> ('연설'이라는 뜻)의 편집장 겸 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러시아 최초의 민선 의회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두마와 정부 사이에는 타개할 수 없는 간극이 형성되었으며 1906년 7월 겨우 73일간의 40회 회기를 마친 뒤 해산되었다. 밀류코프를 비롯한 두마 의원들은 두마를 해산한 정부의 비합법성을 지적하고 국민의 무저항적 저항을 호소하는 비보르크 선언을 채택했지만 헌법적 절차를 무시한 방법이었다. 밀류코프는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을 소외시키지 않으려고 애썼으므로 10월 당원 등 온건파들은 그의 정책을 지나치게 급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곧 우파로 전향한 밀류코프는 제3, 4차 두마에서 상대적으로 감소된 카데트 의원들을 이끌면서 관료제의 병폐를 비난하고 제국 내 소수민족집단의 정치적, 문화적 자치 등 진보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밀류코프는 사정에 밝은 발칸 지역의 슬라브 인들에 대하여 조심스러운 지지를 표명하는 한편 터키령인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러시아의 이권을 주장했으며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대전을 전후하여 밀류코프는 이른바 '방어정책'을 표방했고 1915년 차르 정부가 서유럽 동맹국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비효율적인 전시동원체제를 유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도파 두마 지도자들로 진보 연합을 결성, 여론의 힘을 빌려 국민의 신임을 받는 내각을 구성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소심한 전략이 쓸모없다고 판단되자 즉시 좌파로 전환했으며 1916년 11월 14일 두마에서 사실상 정부가 반역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강도 높은 연설을 했다. 이러한 비난에 특별한 내용이 실려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혁명의 기운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으며 이후의 사태발전은 그 자신이 희망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외무장관 시절]

밀류코프는 러시아의 구심점으로서 차르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옹호했지만 거의 동조자를 발견할 수 없었고 혁명의 물결은 이제 그 자신에게로 밀려왔다. 스스로 구성에 참여했던 게오르기 르보프 공의 임시정부에서 밀류코프는 지적인 면에서 다른 각료들을 압도했지만 곧 사회주의자였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에 뒤처지게 되었다. 이는 케렌스키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양보정책을 취했고 특히 평화협상을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국민의 의사를 존중했기 때문이었다. 외무장관이었던 밀류코프는 전시 동맹체제에 의존했고 터키 해협이 러시아의 소유임을 계속 주장했다. 정부 대내외에서 전쟁 목표를 재정립하는 외교문서를 연합국들에 발송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아온 밀류코프는 5월 1일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으나 문서의 내용은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시가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밀류코프는 대중의 압력과 선동에 못 이겨 사임해야만 했다.

[말년기]

사임 후 밀류코프는 온건파를 규합하여 새로운 연합정부의 좌경화에 대항하려 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17년 11월 7일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케렌스키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자 남부 러시아로 피신했고 백군 지휘관들의 정치적 자문을 맡았다. 1923년 파리로 망명한 밀류코프는 초기의 급진 성향으로 선회 민주공화주의를 바탕으로 국외망명자들의 정치적 의사를 수렴, 조직하고자 했으나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동포들은 보다 급진적인 이데올로기를 지향하고 있었다. 밀류코프는 이 모든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자유주의의 신봉자로 남아 정계와 학계에서 죽을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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