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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극작가 <레싱>의 초기와 극작활동, 전성기 그리고 말년

by 뽀야찡 2022. 11. 24.

독일의 극작가, 비평가, 철학 및 미학 저술가. 독일극이 고전주의극과 프랑스극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데 이바지했으며 지금까지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 첫 독일 희곡을 썼다. 그의 비평은 독일 문단에 큰 자극을 주었고 보수적 독단론에 반대해서 종교적, 지적 관용과 편견 없는 진실 추구를 주장했다.

[교육과 초기 극작활동]

매우 명망 높은 신학자였던 아버지는 수석목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대가족을 부양하는 데 경제적으로 몹시 곤란을 겪었다. 독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레싱은 12세 때 작센 선제후가 창립한 학교인 마이센에 있는 유명한 성 아프라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재능 있고 열성적인 학생으로 평판을 얻은 레싱은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 등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습득했다. 한편 로마의 극작가 플라우투스와 테렌시우스의 희곡에 심취하게 되었는데 이는 자신이 직접 작품을 쓰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1746년 가을,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으나 실제적인 관심은 문학, 철학, 예술 방면에 있었다. 재능있고 활동적인 여배우 카롤리네 노이버의 공연으로 다시 활기를 얻게 된 라이프치히에서 연국에 매료되기 시작했고, 노이버도 이 젊은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되어 1748년 그의 희극 <젊은 학자>를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유대인>에서는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고귀한 정신을 찬양함으로써 당시 생활영역이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제한되어 있던 유대인들에 대해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레싱은 독일의 몰리에르가 되려는 꿈을 갖고 희극의 등장인물들을 개선을 지닌 존재로 흥미 있게 그려냄으로써 전통극의 '전형'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748년 초 라이프치히에서의 연극 활동에 반대하는 부모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의학공부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해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자신도 채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노이버 극단의 단원들을 위해 보증을 잘못 섰다가 빚에 쪼들리게 되었다. 이 극단이 해체되자 채무자들을 피해 라이프치히를 떠나 1748년 베를린에 도착했다. 베를린에서 당신 정평 있는 편집인이자 사촌인 밀리우스에게 언론가로서의 일자리를 부탁하려 했던 것이다. 그 후 4년 동안 그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주로 프랑스, 영국의 종교 및 역사서적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서평 편집자로서 활동했던 <베를린 특보>에서 재치 있고 뛰어난 비평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또한 자신이 직접 <연극의 역사와 수용에 관한 기고>라는 정기간행물을 창간하여 발간했는데 이는 1750년에 중단되고 말았다.

[극작가와 비평가로서의 전성기]

1751~52년 비텐베르크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으로 돌아와 <연극 문고>를 발간하기 시작했으나 이 정기간행물도 4권이 발행된 후에 역시 폐간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1753~55년 자신의 저서를 6권으로 편집, 출판한 일이었다. 이 판본에는 재치 있는 경구들을 비롯하여 라이프치히에 있을 때 쓴 중요한 희극들과 독일문학사상 최초의 시민 비극이자 가정 비극인 <사라 삼프손 양>이 실려있었다. 당시 중간계급 작가들은 문학에서 전통적인 신분상의 구별이 사라지기를 오랫동안 열망해왔다. 종래의 전통극에서는 귀족 출신이 등장인물만이 영웅적이고 비극적인 주제를 연출해낼 수 있었고, 중간계급의 인물들은 희극에서만 등장했다. 사실 레싱이 이 전통에 도전한 최초의 독일 작가는 아니었지만, 공정히 말해 당시 독일 연극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고전주의극과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된 것은 그의 희곡을 통해서였다. 또한 처음으로 시민계급 출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다는 점에서 독일 최초의 시민 비극으로 평가되며, 1755년 프랑크푸르트안데어오데르에서 이루어졌던 초연은 성공적이었다. 성찰하는 듯한 산문조의 대사는 미덕과 마음, 양심과 열정 사이의 갈등 같은 심리 상황을 꾸밈없이 능란하게 드러냈고, 등장인물들의 성격 묘사도 아주 뛰어났다. 극의 구성은 한 시민층 가정의 순진무구하고 감수성 풍부한 여주인공이 중심인데, 그녀는 일체의 구속과 금기를 무시하고 사랑을 쟁취하려는 흡혈귀 같은 마르우드 부인의 희생양이 되고 그녀의 애인이었던 우유부단한 멜레폰트는 결국 죽음으로 자신의 죄를 보상하게 된다. 1765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레싱은 궁정 도서관장의 지위를 원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서 총신으로 지냈던 볼테르와 반목했기 때문에 독일 작가들을 경시하던 왕에게 거절당했다. 그 후 몇몇 함부르크 상인들로부터 그들이 개인적으로 기금을 조성해서 설립한 국민극장의 고문 및 비평가로서 활동해 달라는 제의를 받고 수락했다. 그러나 이 사업은 1년도 못가 실패했고, 결국 아직은 독일 국민극장을 설립한 시기가 아니라는 쓰라린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적 카타르시스라는 유명하고 논의분분한 개념을 관객이 많은 긴장을 가져다주는 비극적 사건을 본 후에 느끼는 이완감으로 해석하면서, 연민과 공포에 의해 생겨난 정서적 감동은 후에 관객에게 도덕적 영향을 주어 미덕을 지는 행동으로 변형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맺었다. 한편 1768~69년에는 할레대학 교수인 C.A. 클로츠의 허시적인 지식과 엘리트적 태도를 비난한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의 편지>를 출간했다. 이와 같은 주제로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평론 <고대인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쓰기도 했다.

[볼펜뷔텔에서의 말년]

극도의 가난 속에서 헤매다가 1766년에 방문한 적이 있었던 볼펜뷔텔에서 얼마 안 되는 보수를 받고 사서직을 맡았다. 이 시기는 불행하고 험난했으나 업적에 있어서는 많은 성과를 얻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성서 비평가이자 학자 라이마루스의 논문에서 극단적인 견해들을 발췌해 <한 익명자의 단편>을 출간했을 때 레싱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격렬한 논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여기서 레싱 자신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반기를 든 라이마루스의 극단적인 견해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신학자들은 이 책의 출간을 정통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급기야 그들의 지도자였던 함부르크 주임 목사 J.M. 괴체와의 격렬한 논쟁을 서두로 정통파 목사들에 대한 싸움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레싱은 이 편협하고 엄격한 교리 주의자에 반대하는 <반괴체>를 비롯해 여러 통렬한 논박문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반괴체>에서 그는 진실의 추가가 정통 교리 주의자들이 집착하는 원리원칙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밝히고 있다. 1772년에 공연된 비극 <에밀리아 갈로티>는 강렬하고 예리한 산문체의 뛰어난 구성 작품으로 어느 이탈리아 왕궁에서 일어난 오아자의 양심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약강격의 운문으로 이루어진 '극시' <현자 나탄>은 깊은 윤리적 문제를 익살스러운 필치로 다룬 신학적, 철학적 성격의 교훈극으로서, 고도로 시적이고 극적 긴장이 조성된 작품이다. <현자 나탄>은  각각의 윤리적 기반을 감안하면서 세계 3대 종교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편견 없이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진정한 종교를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도,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도인 3대 종교의 대표자 가운데, 유대인만이 완전한 인본주의 이상에 부합하는 인물로서 완전히 자신을 극복할 수 있으며, 권력 앞에서도 진실을 말한 용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 저서 <인류의 교육>은 레싱의 정신적 활동을 가장 잘 반영하고 인류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 논문이다. 그는 세계 종교의 역사에서 도덕의식의 발전을 보았고, 그로 인해 일체의 독단과 교리를 초월한 보편적인 형제애와 도덕적인 자유의 절정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처럼 볼펜뷔텔에서 보낸 마지막 10년 동안 철학과 문학 연구에서 풍부한 수확을 거두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몇 차례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외로운 삶을 살았다. 결국 그는 말년을 고독과 가난 속에서 보냈으며 장례도 공비로 치러져 어느 빈민가의 무덤에 쓸쓸하게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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